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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근교산

동작 충효길에서 충(忠)과 효(孝)의 근본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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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올것 같지 않던 봄이 우리 앞에 어느순간엔가 쨘~~하고 나타난것 같다.

오죽하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이 생겼겠는가.

2~3주 전 까지만 해도 앙상한 가지에 잎파리 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 같던 나무가지와 거친 땅에서 

노랗고 붉게 피어나는 꽃들과 마술사가 마술이라도 하는듯 솟아나는 풀잎을 보며 아~ 봄 이구나 해본다.

우리말 ''의 어원에 대해서 두 가지 설이 있단다.

그 한 가지는 불의 옛말 ''()과 오다의 명사형 ''()이 합해져서

'+'에서 ''받침이 떨어져 나가면서 ''이 됐다는 즉  따뜻한 불의 온기가 다가옴을 가리킨다는 말과.

한편으로 우리말 봄은 보다()’라는 말의 명사형 ''에서 온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는데 본인은 후자에 무게를 두고싶다.


산행일 : 2017년 4월 22일 (토)  맑음.

산행길 : 들머리 - 노들역,      날머리 - 사육신묘.

            노들역 - 중대후문 - 현충원상도추립문 - 현충원 - 현충원사당출입문 - 동작역 - 한강나들길 - 효사정 - 사육신묘 

산행거리 : 약 16Km

산행시간 : 5시간 (점심, 휴식포함)

산행인원 : 7명 (서울산행클럽)


봄을 보고싶어 봄길을 찾아가본다.

오늘산행은 캔디대장이 마련한 동작충효길 1, 2, 3, 4, 5, 6, 7코스중

1코스 고구동산길(배수지공원~현충원 상도출입문), 2코스 현충원길(현충원상도출입문~동작역), 3코스 한강나들길(동작역~노량진역)인데

거기에 양념으로 2코스에서 서래섬을 추가하고, 3코스에 이어서 사육신공원을 들르면 약 16Km정도 걸을것 같다.


상도동터널을 바라보며 우측으로 시작되는 고구동산길에 접어드니 어느덧 개나리 진달래는 다 지고 여러색의 연상홍이

순례객이되어 걷고있는 우리를 반긴다.


고구동산길을 조금 오르니 벌써 시원한 한경 주변 경관을 선사한다.

오늘 날씨는 모처럼만에 미세먼지도 없고 가시거리도 좋아서 평소에 잘 안보이던 남산타워는 물론이고 멀리 북한산까지 조망된다.


코스는 야트막한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융단같은 마포대를 깐 푹신한길이다.


꽃밭 사이를 걷는 홴님들은 오랫만에 걸어보는 둘레길에 신바람이 난듯 마냥 즐거운 모습이다.


우리가 사는 주택가에서 그리 멀리 나온것도 아닌데 뺨을 스치는 바람이 정겹고, 지저귀는 새 소리가 반갑고,

새록새록 피어나는 나뭇잎이 햇빛에 투영되어 우리눈을 호강시킨다.


고구동산길에서 가장 높은 곳인 서달산의 서달산 표지석.

이곳 서달산 달마공원은 전에는 현충원 영역에 속해있다가 2009년 8월 근린공원으로 변경 되면서 일반인에 개방됐다.


서달산 정상의 동작대(銅雀臺).

동작대는 3층짜리 정자로 동작구의 이름을 딴것이다.

삼국지의 조조가 업에 세웠다는 동작대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동작대에 올라서면 상도동, 관악산, 사당동 등이 시야에 훤히 들어온다.


이어지는 고구동산길에서 만나는 돌탑과 한껏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연산홍.


현충원 상도출입문으로 들어오면 만나는  호국지장사 (동작동 305)

호국지장사는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갈궁사가 시초이다.

이후 창빈안씨의 원찰로 지정되어 화장사로 이름을 고쳤고, 이후 운담, 경해, 원웅, 명진 등이 여러차례 중수 보전해왔다.

1983년에는 국립묘지에 안치된 호국영령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 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호국지장사로 바꾸게 된 것이다.


지장사가 자리한 곳은 일찌기 이승만 대통령이 들렀다가 '만일 이곳에 절이 없었다면 내가 묻히고 싶은 땅'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국립서울현충원 안에 자리잡고있는 수령 350년의 느티나무 보호수.


국립서울현충원 (동작동 산44-7)

동작동에 위치한 국립서울현충원은 국가와 민족을위해 순국한 호굿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민족의 성역이다.

이곳은 관악산 기슭의 공작봉을 주봉으로 정기 어린 능선이 병풍 치듯 3면을 감싸고 앞으로는 한강수가 굽이쳐 도는 곳으로

풍수상 명당으로 손꼽히는 포근한 땅이다.

6.25전쟁 이후 전사자 수가 증가하자, 1955년 '국군 묘지 관리소'를 창설하였고,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되어 초기의 군인에서 애국지사, 경찰관까지 안장함으로써 겨레의 성역으로 국립묘지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고 박정희 대통령(좌)과 영부인 육영수(우) 여사의 묘소.


흔히 접하기 쉽지 않은 앵무새 한 마라가 길을 잃은듯, 약간은 초쵀한 모습으로 수줍어하며 우리 일행을 맞이한다.


장군묘역 입구.


사무친 산과 강은 그 가슴에 남아있어 교향곡으로 겨례를 부르고

이 푸른 세월 속에 그는 가지 않았노라

넋이여 들으소서 민족의 한 목소리를

정든 땅에 울려 퍼지는 영원한 애국가를........


장군묘역에서 내려다 본 모습.


현충원 내부길에서 유일하게 차가 다니지 않는 솔냇길로 향한다.

이길로 가면 사병묘역이 나온다.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에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나르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럽게 숨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이슬 내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모윤숙 시인

 

현충원길의 이정표.

우리는 현충원 사당출입문으로 나가 동작역으로 간다.


효(孝)는 모든 행동과 가르침의 근본으로 효의 정신을 되새기자는 의미의 부모님 업어주기 조형물.


동작충효길 안내표지.


메모리얼 게이트.

국립현충원의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게이트로서 태극기를 형상화 하여 지붕은 태극문양을, 게이트의 기둥은 건, 곤, 감, 리로 표현하였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며 추모한다.


현충원길을 걷는 우리님들.

현충원의 자랑거리인 벗꽃도 어느덧 다 지고 얼마 남지 않은 꽃잎사이로 새잎이 돋아 벌써 여름을 준비하는 듯 그늘을 만들어 주고있다.


현충원길 끝자락에서 동작역을 바라보며 내리막 계단을 걷는다.


현충원길 끝자락에서 바라보는 한강 풍경.

강건너 이촌동 지역과 멀리 남산이 그리고 그뒤로 멀리 북한산까지 조망된다.


현충원길 끝자락의 이정표.


현충원길을 뒤로하고 동작대교 남단에서 서래섬쪽으로 향한다.


서래섬 방향의 강변길을 걸으며 보이는 한강조망.

왼쪽으로 길게 노량대교가, 멀리는 여의도 63빌딩이, 정면의 한강대교 건너에는 이촌동과 마포가 조망된다.


강가에서 휴식을 취하며 바라보는 동작대교 하부모습.

동작대교는 차도와 지하철 철교가 나란히 달리는게 특징이다.


우측으로 머리를 돌리니 반포대교와 세빛섬이, 그 건너 우측앤 반포지구 아파트촌이 마법의성처럼 조금은 흉물스러워 보인다.


한강대교와 동부이촌동.


동작대교와 멀리 남산이...


서래섬을 찾은 이유는 혹시나 유채꽃을 볼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호기심에 찾은 것인데

역시나 이제 겨우 한 뼘 정도 자란 유채가 우리를 망연자실하게 만든다.


서래섬을 뒤로하고 노량대교 아래로 이어진 한강나들길을 걷는 우리님들.


노량대교 하단에서 한강나들길 흑석동방면 출구로 향한다.


한강나들길 흑석동방면 출구로 나가면서 보이는 조형물.

이곳을 나가면 흑석역 방향이 된다.


흑석역을 지나 효도의 상징으로 유명한 '효사정'으로 오르는 우리님들.


효사정은 세종조에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노한대감의 별서였다.

노한대감의 자는 유린이며 시호는 공숙공이다.

노한대감이 모친을 여의고 3년간 시묘를 했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북쪽 개성에 있는 아버님 산소를 바라보며 추모했던 곳이다.

당시 이조판서 강석덕이 효사정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孝思亭' 현판글씨는 공숙공 노 한의 17대손인 당시 노태우 제13대 대통령의 친필이다.


 이 정자는 효사정의 제자리를 찾기 위해 정인지, 서거정 등의 시문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찾고 하였으나,

주위환경 변화로 부득이 이 자리를 선정하여 신축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 5량 집 구조와 검소한 인도리가구 구조의 팔작기와 지붕에 온돌방 1칸을 겸한 정가형식으로 주위에 난간을 둘렀다.


 지금은 당시 모습도 아니고 위치도 원래 있던 곳과는 좀 다른 곳이지만 풍광은 여전히 아름답다.

효사정은 한강을 끼고 있는 정자 중 경관이 제일 좋은 곳으로 칭송 되고있다.


효사정을 지나 한강나들길을 걷는 우리님들.


효사정과 이웃 하고 있는 '학도의용군 현충비'

6.25전쟁당시 오로지 위기에 처한 조국과 민족을 구해야한다는 일념으로 학업을 중단한 채 전쟁에 참가해 장렬하게 싸우다

꽃다운 청춘을 조국에 바친 학도의용군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1955년 6월 25일에 건립하였다.


한강나들길의 끝자락에 위치한 '용양봉저정'이 있다.

용양봉저정은 정조 15년(1791)에 지어진 행궁이다.


정조 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 참배길에 한강을 건넌 후 잠시 휴식하던 곳이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1789년 부친인 사도세자의 영우원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을 조성하고 자주 참배했다.

이때 왕의 어가행열이 주교(배다리)를 놓은 한강을 건너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들고 장승배기를 거쳐 수원으로 행하였다.

건조연대는 정조 13년(1789)이후로 추정된다.


'용이 뛰놀고 봉황이 높이 난다.'라는 이름의 이 정자는 당시 한강을 건널 때 놓았던 주교의 화려함을 잘 나타내주고 있으며,

오늘도 말없이 흐르는 한강변에서 현대를 사는 우리들 에게 어버이를 섬기는 역사의 교훈이 되고 있다.


사육신공원 담장길에 새겨저 있는 함석헌선생의 사육신을 기리는글.

"수양대군이 불러온 피바람

 그렇지만 세조의 피바람뒤에 우리는 의()를 알았다.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들 우리가 '의'를 알았겠는가.

 이것도 고난의 뜻이지 않을까. 고난 뒤에는 배울 것이 있다."


사육신묘가 자리하고있는 사육신공원입구.


불이문(不二門)

사육신들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충절을 기려서 세운 문이다.

불이문을 지나면 정조가 세운 신도비가 보인다.


사육신묘 (노량진1동 155-1)

조선 세조 2년(1456) 조선의 6대 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바친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6명의 신하 즉 사육신을 모신 곳이다.

이들은 단종 3년(1455)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고 단종을 몰아내자 이에 분개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숙종 17년(1691)에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민절서원을 세우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를 세워두었다.

1955년 서울시는 사육신비를 세우고, 1978년 묘역을 새롭게 확장 및 정비하여 사육신공원을 조성했다.

 

사육신공원은 역사의 현장과 함께 시민들이 편히 쉬고 즐길 수 있도록 묘역과 산책로가 잘 가꾸어져있다.


사육신 역사관.


'의절사'를 산책로에서 새롭게 돋아나는 풀과 함께 담아봤다.


공원 내부에 피어있는 철쭉.

2주 전만해도 앙상한 가지에 초라했던 모습이 언제 그랬냐는듯 제색갈을 뽐내며 아름다움을 한 것 자랑하고있다.


사육신공원내의 조망명소에서 사육신역사관 뒷면을 담아봤다.


사육신공원내의 조망명소에서 바라본 한강과 좌측의 여의도풍경.


사육신공원 산책길을 수놓은 모자익형상의 돌길에 민들레와 들풀이 아름답게 수놓고있다.


사육신공원 담장을 휘돌아 피어있는 연상홍이 붉게 수놓아 마치 사유신들의 충절을 보는듯하다.


동작충효길을 산책을 하듯 가벼운 마음과 발길로 원없이 걸은 하루,

'걷다보면 보이지 않던것 느끼지 못했던 것이 어느 순간 보이기 시작하며 거짓말처럼 풍경이 말을 걸어온다'는

어느 걷기 예찬론자의 경지 까지는 못 다달해도 '높이 나는 새가 멀리보고' '힘들게 높이 오른 만큼 더 멀리 더 넓게 볼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따르며 그래도 가장 중요한것은 나 혼자가 아닌 우리가 함께 했기에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