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지 순례

마음의여행 - 나가사키 성지순례 2일 차

728x90

[오우라 천주당]


나가사키에서의 둘쨋날.

아침에 일어나 밖을보니 어제 저녁부터 날씨가 꾸물꾸물 하더니 비가 내리고있다.

오늘 일정을 시작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어서 어젯 저녁 숙소에서 얼핏 보았던

주변 저수지가 궁금하여 호기심을 발동하여 우산을 밭쳐 쓰고 저수지를 찾아보았다.



어림짐작으로 찾아가 보는 저수지는 생각보다 훨씬 멀리 숙소에서 떨어져있었다.

저수지를 찾아가며 지나는 골목길처럼 좁은 도로 주변의 집들이 생각보다 단아하고 깨끗한 모습이다.



당연히 처음 가보는 길을 몇 구비 돌아 짐작으로 찾아가니 생가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나중에 이 저수지 이름을 알아보니 '오시도리노' 저수지였다.

식수원으로 이용하는 저수지여서 그런지 저수지 주변에 위락시설이 없이 깨끗한게 인상적이었다.



저수지를 둘러보고 숙소로 가는길에 보이는 운젠 도요칸 호텔이 규모가 어느정도인지 짐작케 했다.



나가사키 성지순례 2일차 여정은 숙소에서 빗길을 40여분 달려 '미나미시마바라'에 있는

'아리마 기리시탄 유산기념관'에 도착한다. '기리시탄' 이란 '크리스챤'의 일본식 발음이다.


이 기념관에는 나가사키와 아마쿠사지방의 잠복 크리스찬 관련 유산과 나가사키의 기독교의

전래와 번영, 탄압, 크리스찬 잠복에서 부활까지의 일련의 역사를 보고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자료 전시실에는 시대별로 사진과 설명을 겯들여 일본 카톨릭 교회사를 설명해주고 있다.



일본의 획기적인 인새기술을 가져온 활판 인쇄기.

일본은 천주교를 받아드리며 각종 문물과 기계(기술)는 물론이고 악기 및 그림(예술)들도 들여왔다.



1관과 2관 사이의 로비에 설치 되어있는 금교령후 그리스도교 탄압때의 순교모습을 담아논 순교기념비.



'미노 오도리' 형벌

영주 마쓰꾸라 가쓰이에는 영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미납한 영민에게는 짚단을 짊어지 하고하 불을 붙이는 잔혹한 형벌인 미노 오도리 벌을 내렸다.



유시미의 담합

시미바라, 아마쿠사의 봉기 세력 주모자들은 시미바라 반도와

아마쿠사 사이에 잇는 유시미에서 봉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도.

아마쿠사 시로와 봉기세력은 진중기 아래 모여 주님께 기도를 드리는 모습.



막부, 봉기 발발을 알게 되다.

에도성에 로주(관료)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상사(上史)로서 이타쿠라 시계마사를 파견하기로결정한다.



하라성 총공격

시마바라의 난때 식량과 탄약이 고갈된 봉기세력에 대해

12만 막부군은 총공격을 하여 하라성을 함락시켰다.



그리스도교 탄압에서 시마바라, 아마쿠사 봉기 발발까지 연대별로 정리된 도표.


16세기 중반, 일본에 최초로 도착한 서양인은 포르투칼인이었다.

대항해시대 전 세계로 떠났던 포르투칼의 목적은 무역을 통한 부의창출과 선교였다.

포르투칼은 총을 일본 영주(디이묘)에게 판매해서 큰 이익을 얻고, 일본은 신기술의 수입이란 긍정적 측면에서 에도(도쿄)

막부에서도 서양 세력과의 교류에 부정적이지 않았다.


1549년 로마 교황청 소속의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사비에르'가 가고시마에 도착한후 꾸준한 선교 활동을 벌이면서

1624년 경에는 규슈 지역에만 60만여 명의 신자가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기독교 교세가 빠르게 확장되자 에도 막부도 서서히 기독교 포교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1587년

도요토마 히데요시에 의해 기독교 금지령을 내리면서 탄압하기 시작했다.


마쓰쿠라 가쓰이에(松倉勝家)가 다스리던 히젠(肥前) 시마바라 반도(島原半島)의 시마바라 번데라자와 가타타카(寺沢堅高)가

다스리던 가라쓰 번(唐津藩), 이 두 번의 주민들이 인민들의 혹사와 과중한 연공(해마다 현물로 바치는 공납으로 수입의 약 절반을

쌀로 바쳤음)부담, 거기에 더해 번의 기리시탄 박해와 기근에 의한 어려움까지 겹치면서 양 번에서 모두 반발이 일어났다.

이것이 '시마바라의 난'(1637년 12월 11일)이다.


기리시탄 4만여 명이 주도한 이 반란에서 '인민'은 곤궁한 생활에 빠져있던 농민뿐 아니라 예속민을 포함한 농업, 어업, 수공업,

등의 거의 모든 산업 종사자들까지 크고 넒게 포함되어 있었으며, 가톨릭 교회 탄압에 대한 반발이라는 종교적 성격과 세금 착취로

야기된 생존권 문제가 모두 포함된 복합적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12만 명의 진압군에 의해 4개월 만에 진압되었으며, 기리시탄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가혹해졌다.


막부는 반란군에 대해 가혹한 처단을 내렸고 시마바라 반도와 아마쿠사 제도의 기리시탄들은 난에 참가하라는 잇큐군의 강제를 피해 숨은 자나 마침 타지에 있어 반란군에 가담하거나 끌려가는 일 없이 살아남은 예전 영지 주민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기리시탄들은 깊숙히 숨어버렸고 가쿠레키리시탄(잠복크리스찬)이 되었다.



남방지역을 왕래했던 무역선과 무역을 통하여 일본에 들여온 악기와 음악, 서적과 인쇄기,  

그림(회화), 그리고 서로의 지도와 정보를 주고 받은 자료가 설명 되어있다.



하비에르에 이은 일본의 그리스도교 포교의 공헌자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와

알렉산드로 발리냐노는  이탈리아의 명문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성직자의 길을 걸은 사람으로
미나미시마바라 올레 시작점인 구치노쓰항 근처 공원에  알렉산드로 발리냐노 동상이 있다.



세미나리요에서 학습한 서양 복장과 악기를 다루고 있는 덴쇼 소년사절단의 모습과

히데요시로부터 스카웃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한 이토 만쇼, 신앙을 버린 단 한 사람

지지와 미게루, 꿋꿋하게 신앙의 길을 걷고 순교한 나카우라 줄리안,

그리고 어학에 천재였던 하라 마르티노의 삶에 대해 설명되어있다.



'덴쇼 소년사절단'은 1582년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일본 기리시탄 다이묘인
오토모 요시시게, 스미타다, 아리마 하루노부 등이 조정을 대신하여
로마 가톨릭 교황을 알현하기 위해 파견한 4명의 사절단이다.



금교의 시대, 250년간 잠복할 수 있게 해 준 세미나리오의 가르침.


     아리마의 세미나리요는 일본에서 가장 빨리 유럽 예수회의 유럽식 교육기관으로 설립되었으며
     일본 첫 사제와 나가사키 16성인, 천정유구소년사절단(天正遣欧少年使節) 4명도 배출했다.

     금교령 등을 위해 위치를 3번이나 바꾸기도 했지만, 현재 1601년 현재자리로 옮겨지고

     아리마 세미나리요 자리에 비석이 생겼다.
     세미나리요에서는 일본어의 읽기와 쓰기, 그리고 라틴어, 음악수업이 있었다.



1854년 외세의 압박에 의해 개국(開國) 한 후 부터 1873년 금교령 철폐, 1981년 요한 바오로 2세 방문 등

일본의 근대 교회역사를 연대별로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정리해 놓았다.


1854년 일본개국 : 17세기 초부터 일본을 통치해 온 도쿠가와 막부 정권은 강력한 쇄국 정책을 써서 서양인들의 일본 내왕을 막았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양의 제국주의 세력은 일본에 거세게 밀어닥쳤다.

                          1853년 미국의 해군 제독 페리가 군함을 이끌고 와서 통상을 요구하였다.

                          이 같은 압력에 못 이긴 일본은 이듬해(1854년)에 미국과 화친 조약을 맺고 시모다 · 하코다테 두 항구를 열었다.



'헤리타케 유산기념관'의 관람을 마치고 같은 지역인 '미나미시마바라'의 '미즈나시'화산 재해마을을 찾았다.



입구에는 시마바라 반도 유네스코 그로벌 지오파크(지질공원) 안내 지도판이 서 있다.



그리고 한켠에 '토석류(화산쇄설류) 피해 가옥 보존공원' 비석이 서있다.



피해 가옥 보존공원에 들어서면 1,359m의 헤이세이(平成)신산(新山)을 올려다 볼  수 있는 망원경이 설치돼있다.

오늘은 비가오고 있는 관계로 헤이세이 신산을 볼 수가 없는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입구 좌측으로는 후케역 입구 건물과 함께 이곳이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된 걸 기념하는 깃발들이 서 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니 화산재가 밀려와 땅 속에 뭍혀있는 가옥들이 나타난다.



이 가옥들은 1991년 9월 15일 운젠다케(운젠산)에서 발생한 용암분출로 산이 하나 더 생기는데 그 산이

헤이세이(平成)시대 (1989년 이후 부터 시작한 일본연호)에 새로 생긴 산 이라하여 헤이세이 신산(新山)

이라 부루며 그 과정에서 화산쇄설물이 흘러내려 많은 사람이 죽고 마을이 사라지는 재해가 발생했다.

그리고 이 지역이 운젠다케에서 60Km이상 떨어져 있는데도 화산제가 밀려와 피해입은 모습을 보존한 지역이다.



피해가 심한곳은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이곳은 시마바라 반도 끝 부분이어서 그나마 피해의 흔적이 남은곳이다.



집 전체가 화산제에 묻혀 지붕의 기와만 남은 모습.



어제 보았던 운젠지옥도 운젠다케 화산활동으로 생긴 지형이며 또 다시 화산활동이 일어날 경우에는

시마바라 반도가 다시 물속으로 잠길 수도 있다고 지질학자들은 들려준다.



'토석류(화산쇄설류) 피해 가옥 보존공원' 을 둘러보고 나오며 보존지역 전체 모습을 담아봤다.


토석류 피해 가옥 보존공원을 둘러보고 지형적으로 안전한 우리나라땅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비오는 길을 약 20여분 달려 시마바라성으로 향한다.



시마바라성.


     1618년부터 7년에 걸쳐 축성된 성으로 천수이하 건물이 파괴된것을  1960년대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그리스도교 탄압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과거 역사를 갖고 있어 성의 1,2층은 그리스도교 자료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고

     5층의 천수각은 시마바라 시내는 물론 아리아케 바다(有明海)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도쿠가와 막부가 크리스찬 성주를 견제하기 위해 큰성을 축조하였는데 이러한 성을 쌓을려면 큰돌,사람,돈이 필요하므로

     영주가 민초들에게 성금과 세금을 착취하고 크리스찬을 박해하려 했다고 한다.

     성의 방비를 위해서 다리를 놓기도 하고 길 또한 꾸불꾸불하게 만들고 성밖에는 해저드를 만들어 놓기도 한다.

     성벽에 큰돌을 사용하는 것은 힘의 과시라고 한다.




성 꼭대기 전망대까지 올라가면 3면이 바다인 시마바라 반도와 웅장하게 솟은 운젠산을

볼 수 있다는데 엄청나게 내리는 비와 바람에 키리시탄 사료관만 보는것으로 만족 해야했다.



약 400여년전 축조된 성으로 성벽은 그데로이나 건물은 증축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3개의 성을 축조하였으나 현재는 2개만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시마바라성의 종탑.





시마바라성 내부의 키리시탄 사료관 전시장 모습.



마리아 관음상, 불교의 관음상 모습으로 만들어진게 이체롭다.

 


꽃 십자가 문양그릇, 일상생활품에도 곳곳에 아름다운 문양의 십자를 그려 넣었다.



기리코다이(일부를 깍아낸 굽) 하가야기 그릇 바닥과 아래에 새겨진 십자가 문양과

분고국 오카 성주 나카가와 가문의 '나카가와 십자가' 문양, 그리고 제단에 올리는 오리베 촛대.



다치바나 가문 기온 십자가 문양이 새겨진 업무용 상자와 감실이 딸린 청동 마리아 관음상.


가장한 십자가 지장형 등통, 옆면은 불상모양 이지만 내부에 십자가가 새겨저 있다.





시마바라 반도에는 약 120기의 그리스도인 묘비가 남아있다.

그 가운데에서 미나미아리바시 니시아리에 초에 있는 이 묘는 길이 120Cm나 되는 큰 묘이다.

정면에 비문을 새겨넣고 뒷면에는 꽃 십자가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아마쿠사 시로 진중 깃발.


                         아마쿠사 시로는 1637년 일어난 아마쿠사 시마바라(島原) 반란을 이끈 대장이며,

                         진중기는 그 전쟁에서 사용하던 깃발을 말한다.

                         아마쿠사 크리스천관에 있는 진중기는 국가지정 중요문화재로 중요시하는 유물이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지금이 2월 중순인데 이곳 시마바라성 매화 정원에는 매화가 개화를 시작했다.


올 들어 첫 매화 구경을 이곳에서 즐기고 콜배 신부님 기념관이 있는 혼고치 성당으로 가는길에

점심을 먹기위해 치도리 카스테라와 바다 경치가 멋있는 치지와 전망대 휴계소로 간다.



점심을 해결 하기위해 들른 치지와 전망대 휴계소에서 식사후 잠시 망중한을 즐긴다.

 


전망대 앞에 펼쳐지는 다치바나 만의 해안가가 비오는 날씨에 운무가 가득해 아쉬움을 남기고

다음 목적지인  콜배 신부님 기념관이 있는 혼고치 성당으로 발길을 돌린다.



치지와 전망대 휴계소에서 차로 거의 한 시간을 달려 성모의기사 고등학교와 같이 있는 혼고치 성당에 도착한다.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는 혼고치 성당과 입구의 성모 마리아상.



성당 언덕에 올라서니 나가사키 시내 모습이 언덕 아래 전개된다.



성모의 기사 수도회 콜배 신부님 기념관 앞의 2005년 4월에 건립한 콜배 신부님 일본 입국 75주년 기념 동상.


                    성모의 기사 수도회는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배(1894 ~ 1941) 사제 순교자가 설립하였다.

                    폴란드인 콜배 신부는 1930년 일본으로 선교를 위해 건너와 나가사키에 거주하게된다.

                    콜배 신부는 일본에서 원죄없으신 수도원 설립과 사제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건립하고

                    직접 철학을 가르치는 한편 월간잡지 <성모의 기사> 를 발간하며 선교에 힘쓰셨다.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니 목각으로 제작된 원죄 '없으신 성모마리아'님이 순례객을 반긴다.



1관과 2관으로 나누어진 둥근 원형 형태의 기념관에 콜배 신부님의 각종 유물들이 전시 되어있다.



콜배 신부님이 착용했던 제의.



콜배 신부님이 미사 집전때 사용했던 미사전례서.



콜배 신부님의 친필 편지와 콜배 신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폴란드 정부가 발행한 기념 주화(은화)와 우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이곳에 방문하시어 성 콜배 성인의 방에서 사인하실 때 사용한 만년필과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Christ even today, yesterday, and forever it)'

라고 적으신 필적이 보관돼 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성하의 주케토(모자), 일본 방문 기념묵주, 그리고 공식 첫 일본방문 기념메달.



나가사키 거주 신자가 가정에서 사용했던 제단.

정교함과 정성이 담겨 있씀을 알 수있다.



그리고  콜배 신부님과 관련된 여러 기념물들이 전시 되어있다.



기념관 밖 한편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계신 성 요셉상 옆에 '무록자 위령지비'(무연고자 위령비)가 눈에 들어온다.



루르드 성모동산으로 올라 가는 길에 콜베 신부님 동상앞에 모여있는 순례객들.



‘사랑의 순교자’라  불리우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1894-1941)는 '성인'이고 '순교자'이며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신부'다. 축일은 8월 14일이다.

      1894년 1월 7일 폴란드 우지 근처의 즈둔스카볼라에서 출생, 세례명은 '라이문도'였다.

      '막시밀리아노,는 1910년 9월 4일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면서 얻은 수도명이다.

    

    콜베신부가 성인인것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다른 사람을 대신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같은 놀라운 사랑과 희생을 기리며 1982년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사제를 '사랑의 순교자'로 시성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폴란드의 무염 성모 마을의 원장으로 있던 콜베 신부는 독일군에 의해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 노동 수용소에

    감금됩니다. 그곳에는 한명이 탈출하면 10명을 굶겨 죽이는 잔인한 규칙에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죄수가 탈출하자 벌책으로 10명이 아사(餓死) 감방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때 자신이 죽으면 남은 자식들은 어떻게 하냐는 한 사나이의 절규를 듣고, 콜베 신부는 그 사람을 대신해 죽겠다고 자원을 합니다.

    콜베 신부는 다른 아홉 명의 영혼을 위로하며 끝까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도록 합니다.

  그 전까지 아사 감방에서는 절망과 고통, 하느님을 원망하는 소리뿐이었지만, 이 때만은 기도와 성가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프랑스 루르드 성모동굴의 모습으로 조성된 성모기사회의 성모동굴.


꼴배신부 기념관을 나와 약 5분여 정도 이끼낀 계단길을 오르는동안

로사리오 기도를 드릴 수있는 로사리오 길을 지나 오르면 루르드 성모동산에 다다른다.

이곳에는 치유의 샘물이 있어 감사한 마음으로 목을 축이며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다.





루르드 성모동산에서 성당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예쁜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활짝핀 매화를 나가사키 시내를 배경으로 담아봤다.



혼고치 성당 내부의 미사 제대.

나가사키 성지순례 둘쨋날 미사를 혼고치 성당에서 미사드렸다.



혼고치 성당내의 한편에는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성인의 영정을 모신 소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혼고치 성당내의 신자석 앞에 나무그릇으로 만들어진 성합에 성체를 모신 것이 인상적이다.


혼고치 성당에서의 미사를 마치고 나가사키 시내에 자라하고 있는 오우라 천주당으로 향한다.



나가사키 시내 나가사키역 근처에 있는 아우라 성당을 오르는 언덕길.

성당 오르막길이 서울의 명동성당 오르는 언덕과 비슷한 분위기가 든다.



언덕길을 잠시 오르니 고딕양식의 하얀색 건물 오우라 성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우라 성당 아래 정원에는 프티잔(Bernard thadee Petitjean)신부의 동상과 요한 바오로 2세 흉상이 있고

세 여인이 프티잔신부를 찾아와서 '여기 저희들도 신부님과 같은 신앙입니다' 하며 은밀히 신자임을 고백하였고

그 뒤 우라까미등에 잠복해 있던 신자 약 1만명이 교회로 복귀하였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는 비가 조각되어 있다.



오우라 천주당.


     오우라 천주당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자 고딕식 건축물로 프랑스인 신부에 의해 1865년에 세워졌다.

     아쉽게도 1945년 원폭으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은 1959년에 새로 지어졌다.

     정식 명칭이 '일본 26성인 순교성당'으로 시자카(西坂) 언덕에서 순교한 26성인에게 기도를 올리기 위해 파리외방전교회

     (Missions Etrangeres de Paris)에서 파견된 프티잔(Bernard thadee Petitjean)과 퓌레(Louis Theodore Furet)라는

     두 프랑스인 신부에 의해 세워졌으며, 그 때문에 정면은 니시자카(西坂) 언덕을 향하고 있다. 

     26성인이 순교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2월 5일에 추모 미사가 거행되고 있다.



성당내부 모습.


성당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약 100년 전의 프랑스제 스테인드 글라스가 장식되어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원폭에 의해 크게 파손되었으며, 현재는 당시의 스테인드 글라스와 새로 복원된 것이 혼재해 있다.



본당옆 옛 신학교 건물에 전시 되어있는 26성인 순교장면을 그린 그림.

일년 내내 관광객들과 천주교 신자들의 순례 행렬이 끊이지 않는 본당 옆에는 1875년에

지어진 유서 깊은 옛 신학교가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는 전시관으로 사용되고있다.



오우라 성당을 순례하고 언덕길을 내려오다보니 나가사키항이 바로 코 앞에 보인다.

음식점과 기념품 가게가 즐비한 이 언덕길이 '그라바 거리'라고 현지인이 귀뜸해준다.



그라바 거리를 내려와 큰길가로 나오니 마침 지나는 전차가 도시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서울에서 거의 50여년 전에 사라진 전차를 보니 전차타고 학교 다니던 생각이 문득 생각난다.




오우라 천주당 순례를 마치고 다시 탑승한 버스는 타테야마공원 방향의 언덕길을 굽이굽이 힘들게 오르더니

우리를 깍아지른 언덕에 지어진 보기에도 어지러워 보이는 나가사키 니쇼칸 호텔에 내려 놓는다.




오전까지 내리는 비를 맞으며 나름 분주하게 다닌 나가사키 성지순례 둘쩻날도 이렇게 해서 끝났다.

오늘은 나가사키 시 3정목(3丁目) 근처의 나가사키 니쇼칸 호텔에 여정을 풀고 고단한 몸을 쉬어본다.



호텔 배정받은 방에서 내려다 보이는 나가사카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면으로 멀리 보이는 나가사키만 위의 현수교가 메가미 대교(女神大橋)다.



어둠이 내린 시간에 내려다 보는 나가사키 시내 야경.

내일 우리가 만날 성지들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며 피곤한 몸을 쉬어본다. ^^**^^

 



Brule [Lakota Piano] - Color Nature G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