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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순례

마음의여행 - 나가사키 성지순례 3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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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 대좌에 새긴 일본 26인 순교성인상.


          1981년 2월 26일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이 순교지를 방문하여 이 기념비가 전세계를 향하여 사랑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끊이지 않고, 신앙을 전파할 수 있도록 기원한다고 말씀하셨다.

          26성인중에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일본에 잡혀가 그곳에서 영세 입교하고 성프란치스꼬 삼회에 입회하여

          역행을 쌓다가 순교한 성바오로 이바라끼, 그의 동생 성내오이바라끼 그의 아들 12세의 소년 루도비꼬가 포함되어 있다.



나가사키 성지순레 3일차.

나가사키역 앞에서 시작되는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서판공원이 나타나는데 이곳에는

기독교 금지령에 의하여 처형당한 26명의 가톨릭 선교사와 일본인 신자가 기도하는 모습을 새긴 조각상이 있다.



26성인 기념성당.

나가사끼 순교지를 내려다보는 곳에 성당이 서 있다.

순교당시 나가사끼의 많은 신자들은 26성인과 함께 이곳에서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기념관 성당 입구에 서 있는 일본 26 성인 기념관 안내판.

친절하게도 한글로도 안내문을 적어 놓아 친근감을 느끼게 해준다.



일본 26 성인 기념성당.

1962년 6월에 완성된 이 성당에는 상징적인 두 개의 탑이 있다.

하나는 성모마리아를 받들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성령을 의미한다.

휴닉스 모자익은 교또, 오사까 등에서 잡혀온 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수집해온 도자기파편으로 제작된 것이다.



26성인상과 26성인 기념성당을 같이 담아봤다.


           1593년 프란치스꼬회 선교사들이 일본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벌인 것이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비위를 상하게 하였다.

           또한 1596년 도사에 표착한 스페인 선박 산펠리페호 사건까지 겹쳐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부채질 함으로써

          1597년 2월 5일 프란치스꼬 수사 6명을 비롯한 3명의 예수회 수사와 미끼 등 일본인 17명이 나가사끼, 니시사까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이들은 1862년 성인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시성 100주년을 맞이한 1962년 6월 10일 기념비가 완성되었다.



기념관 입구가 되는 일본 26 성인상 뒷면의 모자이크 조형물.

1597년 1월 4일 교토를 출발해 2월 5일 나가사키에 도착한 26 성인의 힘겨운 여정과 영웅적인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우측의 26개 포도송이는 성경에 있는 상징으로 26 성인이 십자가에서 하느님께 드린 희생을 표현한다.



윗 부분에 보이는 수르숨 꼬르다(SURSUM CORDA)는 라틴어로 '마음을 드높이'라는 뜻이다.

순교자들이 걸어온 길에서 그들이 바친 기도와 염원을 느낄 수 있다.



기념관 안에 들어서면 벽면에 사각의 조형물이 눈에띈다.

중앙에 시작과 끝을 나타내는 알파와 오메가가 새겨저있고  그 주위로

순교한 26성인을 나타내는 26개의 십자가가 새겨저 있어 26 순교성인을 나타냄을 알 수 있었다.



기념관에는 일본 선교사들의 유품과 순교 성인들의 유품 및 순교 당시의 형틀 등이 진열되어 있고 유해소가 안치되어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한 성 바오로 미키 성인.


     바오로 미끼는 1564년 일본 오사카 인근의 도쿠시마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사제서품을 앞두고 있던 분으로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주위에 모여든 군중에게 힘주어 강론을 했다고 한다.

     먼저 자신이 일본인이며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죽는다고 선언하고 이러한 위대한 특전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강론을 마쳤다고 합니다.

          “나는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의 길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이 길이 나의 원수들과 내게 폭력을 가한 모든 이를 용서하라고 나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국왕을 용서하고, 나에게 사형을 집행하려는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으라고 간청하는 바입니다.”



서방 선교사들이 타고왔던 무역선 모형들.

그때의 배들은 무역선 이어도 군함과 모양이나 규모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한다.

이유는 항해중 해적도 만날 수 있었기에 배에 대포도 설치하고 어느정도의 병력도 함께 했단다.



가이드의 안내와 설명을 듣는 순례객들.

박해 시절에 26명의 성인과 천주교 금지령과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순교 성인의 유해를 모셔놓은 유해소.



아기 예수를 안고있는 성모마리아.



그레고리안 성가책.



고이치 디에고와  조선인 카이오의 형제애를 새긴 기념비.


          우라카미의 농부 고이치 디에고는 도미니코회 선교사를 숨겨준 죄로 체포되었고,

          조선인 카이오는 임진왜란 때 연행되어서 일본의 사찰에서 지내다가 사카이에서 세례를 받고 예수회 선교사의 전도사로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이 두 사람은 처음 만날 때부터 서로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형제애를 깊이하였고 옥졸에게도 하느님을 전하려 했다.

          1624년 11월 15일 당당하게 형장으로 나아가 기쁘게 화형을 받았다. 재는 앞바다에 던져졌다.



뒷면에는 기념비의 내용과 기념비를 제작, 축복한 경위를 설명하고있다.



기념관을 나오며 일본 26 성인상 뒷면의 모자이크 조형물앞에 놓여있는 나가사키 원폭때 타다 남은 나무.



기념관을 둘러보고 언덕길을 내려와 다음 순례지로 가기위해 '나가사키역'앞 육교에서본 거리모습.

우측 큰건물이 '나가사키역'이고 거리엔 전차가 다니는 모습이 이체롭다.



나가사키역 주변 도로의 또 다른 모습을 보며

과거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성당인 우라카미 천주당(浦上天主堂)으로 향한다.



우라카미 천주당(浦上天主堂)


          메이지 유신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천주교인들이 건립한 성당으로 1914년 완공 당시에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컸지만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에 투하된 원자 폭탄으로 잿더미만 남게 되었다.

          현재의 성당은 1959년에 재건되었다.



우라카미 천주당 오름길 우측에서 성당에 오는 모든이를 맞이해 주시는 성모자상.



원자폭탄 피폭의 유구인 석상.



옛 성당에 있던 천사상들이 피폭으로 인해 구워져있다.



우라카미 천주당을 전면에서 바라본 모습.

우라카미 천주당 순례를 마치고 나오는 이곳 중학생들의 교복 모습이 이채롭다.

일본에서는 다는 아니지만 일부학교에서는 남자를 강인히게 키운다는 전제하에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힌단다.



우라카미 천주당 입구 좌측에 있는 슬픈 모습의 성모상 옆에 탄압시절이 지나 신앙자유를 얻자 

잠복교인들이 다시 성당으로 모이기 시작한지 15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조각상이 있다.



우라카미 천주당은 마침 돌아가신 분을 위한 장례미사가 집전 되고있어서

본당 바로옆에 붙어있는 26성인 기념성당에서 나가사키순례 3일차 미사를 드렸다.



제대 중앙에 원자폭탄 피폭 후 잔해물에서 찾은 마리아상의 머리 부분이 모셔져있다.

그 뜨거운 피폭 열에도 얼굴 한 쪽만 그을렸을 뿐 비교적 온전한 모습이다.



피폭에 그을린 마리아상 우측에 있는 마리아 두상.



상부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승천하는 형상으로 모셔져있다.



그리고 기념성당 내부 좌측 벽에는 피폭으로 인해 사망한 8천 여명의 나가사키 신자들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다.



우라카미 천주당이 1945년 피폭으로 파괴된 모습을 담은 사진과 설명.



옛 우라카미 천주당 종탑의 종 파편.

피폭당시 엄청난 파괴력에 의해 우라카미 천주당 종탑이 부서지며 이곳까지 날아왔다.



피폭당시의 파괴된 종탑을 찍은 자료 사진.




피폭으로 인해 파괴되어 날아온 종탑의 잔해와 우라카미 천주당을 같이 담아봤다.



평화기념상 보수공사가 한창인 나가사키 평화공원의 모습.



평화공원의 원폭피해자를 위한 평화를 염원하는 탑위에 종이학이 눈에 띈다.



나가사키 평화공원의 평화기념상. 마침 보수공사중 이었다.

평화공원은 원자 폭탄 낙하 중심지와 그 북쪽의 언덕을 포함하는 지역에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나가사키 출신의 유명한 미술가 기타무라 세이보(北村西望)가 1955년 완성한 높이 9.7m, 무게 30t에 이르는 거대한 청동상으로

이체로운것은 청동상의 모델이 그 당시 세계적 이름을 알렸던 레슬링선수 '역도산'이라고 한다.


 

평화기념상에 대한 안내가 한글로 자세하게 설명되어있다.



우리는 평화공원 근처에서 점심을 일본식 중화요리로 해결하고  버스로 이동하여

일본에서는 보기힘든 잠복 기리시탄의 성지 '카레마츠신사'로 향한다.




카레마츠신사 (神社(신토))

일본 금교령시대, 소위 에도를 수도로 해서 나라를 다스렸던 에도시대(에도-토오코오)에

이곳이 이 지방의 기독교도가 은밀하게 모여 기도하고 교습하며 구전으로 이어지는 신앙생활을 했던 장소이다.




잠복 크리스찬들은 산중에 신사를 만들고 제사를 온것처럼 핑계하여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다신교로 유명한 일본에는 무려 800만 개의 신이 있고 

     신사(神社)는 일본신토신앙에 근거해 만들어진 종교 시설이다. 전쟁 전에는 이른바 '국가 신토'를 단지 신사라고 불렀다.

     교회모스크 등의 예배하기 위한 예배당이나 가르침을 넓히기 위한 포교소와는 성격이 다르다.

     현재는 참배용의 시설이나 결혼식의 설비 등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많지만 원래는 그 신사의 장소에 머무는 신을 모시는 제사 시설이다.

     또 장소에 따라서 신전을 해상·산정·빌딩의 옥상 등에 모시기도 한다. 




카레마츠신사 바로 옆에 자리하고있는 묘역.

금교령시절 조성된 불교식 묘역으로 망자 이름을 세기는 위폐가 양쪽에 있어

한쪽은 불교식 법명이 다른 한쪽엔 이름과 세례명이 적혀있다.



카레마츠신사와 주변 묘역을 둘러보고 소토메 역사민속자료관을 찾았다.


     나가사키의 소토메는 일본의 국민작가 고(故)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소설<침묵>의 무대가 된 기리시탄의 마을이다.

     산세와 지형이 험하고 벼랑이 많으며, 평지가 거의 없어 '육지 속의 외딴 섬'이라 불렸지만, 혹독한 자연조건 덕분에

     종교 탄압의 시대에도 많은 잠복 기리시탄(크리스챤)들이 그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곳이다.



소토메역사민속자료관(外海歴史民俗資料館)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소토메 사람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시,

이 중에서도 마리아 관음상 등 잠복 기리시탄의 자료가 많은 곳이다.



소토메역사민속자료관 안에는 소토메가 사람이 살기에는 척박한 땅이었지만

오직 신앙만을 지키려고노력하며 힘들게 살았던 삶의 모습들을 보여주고있다.



땅은 지형이 험하여 농사는 힘들었을것이고 바다가 코 앞이니 고기잡이가 생업 이었을 것이다.



1층에는 옛 소토메 사람들이 사용했던 도구들인데 우리눈에도 별로 낮설지가 않다.

아무래도 우리와 이웃이다보니 농사 짓는 방법이나 도구 사용법이 비슷하였던 것 같다.



2층 자료실에 올라가면 가장 먼저 만나는 십자가.


 

2층 자료실에는 당시 사용하던 십자가와 많은 천주교 유물들이 전시 되어있다.


소토메역사민속자료관에서 옛 소토메 기리시탄의 삶을 둘러보고 이웃에 있는 도로신부님 기념관으로 향한다.



                                                               도로신부님동상.

1879년 이곳의 주임사제로 부임한 이래, 33년동안 가난에 시달리는 소토메의 주민을 돕기 위해 사재를 털어가며

많은 사회복지사업을 헌신적으로 펼쳤고, 가난으로 인해 버려지는 아이들을 보살피셔서 '고아의 아버지' 라는 별명도 가지고있다.


 

이곳 도로신부님 기념관에는 당시 도로신부님이 사용하시던 오르간, 성경책, 성물들은 물론이고

신자들을 위해 만든 직조기와 문양 견본, 성경 이해를 위한 판화, 편리한 생활을 위해 만든 도구들도 전시되어있다.



이 전시관은 고기잡이를 하는 어민들을 위한 그물을 짜던 공장이었다고한다.

도로신부님 기념관을 관람하는 우리님들 모습이 진지하다.



도로신부님기념관을 나와 시츠성당으로 가는 길옆 옛 기와집 기와에 새겨있는 십자가가 이곳이 기리시탄 마을임을 말해주는듯하다.



옛 마을길을 벗어나니 저만치 언덕에 도로신부님이 지으셨다는 하얀탑을 머리에 이고 있는 '시츠성당'이 보인다.



시츠성당 올라가는 길목에 도로신부님이 이곳 사람들의 식수를 위해 파놓은 우물을 지난다.



시츠성당 올라가는 길목에는 봄꽃들이 한창 꽃망울을 터트리고있다.



시츠성당 바로 옆에있는 탑위의 예수님상.



시츠성당 정면의 모습.



시츠성당 지붕위의 탑에 모셔진 성모 마리아상.

멀리서는 잘보이는데 성당 바로 아래에서는 못보는 경우도 있다.



     1865년3월에 오우라천주당(大浦天主堂)에서 있었던 “신도 발견” 이후 9월에 프티쟝(Bernard Thadée Petitjean) 신부가

     소토메(外海)를 방문하여 신자들과 접촉하였다.
     그리스도교 금지령이 풀린 뒤 페뤼(Albert Charles Arsène Pélu)신부가 시츠(出津)에 임시 성당을 짓고 선교를 하였다.

     1879년에 드로 (Marc Marie de Rotz) 신부가 부임하였고, 1882년에 드로 신부 스스로가 설계하여 시츠(出津)성당을 세웠다.
     1891년과 1909년에 증∙개축을 함으로써 두 개 종탑을 갖춘 독특한 외관을 지니게 되었다.



'인간은 이리도 슬픈데, 주여 바다는 푸릅니다.'

나가사키 소토메에 세워진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의 명구절을 새겨넣은 문학비 '침묵의 비'.

소토메는 <침묵>의 실제 무대배경이 된 마을이다.



드넓은 바다를 배경으로 서있는 '침묵의 비'

침묵의비와 드넓게 펼처져있는 바다를 바라보며 옛 소토메 기리시탄들의 삶을 다시한번 떠올려본다.



'바다는 한없이 넓고 슬프게 펼쳐져 있었지만, 그때도 하느님은 바다 위에서 완고하게 침묵하고 있었다.'

(엔도 슈사쿠, 소설『침묵』에서)


소토메 언덕에서 아름답게 펼쳐지는 바다와 주변 경관을 보며 마음의 힐링을 느껴본다.


소토메에서 나가사키순레 3일차 여정을 마치고 숙소가 있는 사세보로 가는도중에

'서해의언덕전망대'가 있는 '사이카이바시'(西海橋)공원에 들려 만개한 벗꽃을 감상하며 즐겨본다.



'서해의언덕전망대'가 있는 사이카이바시(西海橋)공원에서는 신사이카이 다리(新西海橋)도 보이며

3월에 들어서면 이곳 벗꽃 구경을 하기위해 일본 각지에서 관광객이 몰리는 곳 이라고한다.




사이카이바시(西海橋)공원의 벗꽃 사이로 신사이카이 다리(新西海橋)의 아치가

아름다운 곡선을 보이고있다. 우리는 저 신사이카이 다리를 걸어서 건널것이다.


사이카이바시공원에서 좁은 바닷길 저쪽으로 사이카이 다리(西海橋)가 보이고있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서 건너갈 신사이카이 다리(新西海橋).

이 다리는 2층구조의 다리로 상부에는 자동차 전용도로이고, 하부에는 걷기전용으로 지어졌다.

다리 이쪽이 사이카이시(西海市)이고 다리 건너가 사세보시의 하리오지마(針尾島)다.



신사이카이 다리를 건너며 바라보는 사이카이다리.

다리 아래에는 언듯보기에 폭이 좁아 강 같이 보이지만 오무라만 해협이다.

오무라만의 해수가 썰물 때 한 번 이 좁은 해협을 통과하는 모습이 장관이며,

빠른 조류로 인해 바닷물이 소용돌이 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이카이 다리를 지나면 만나는 '도라 도라 도라'의 현장.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본이 진주만 공격을 명령하는 '도 도 도'를 타전하여 사실상 여기서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곳이다.

 "도라 도라 도라"는 공격 성공을 알리는 일본군측 암호였으며, 공격기 편대의 공격 개시 암호는 "도 도 도"였다.

1970년에는 미국과 일본의 합작으로 진주만 공격을 소재로한 영화 '도라 도라 도라'를 제작하기도했다.



신사이카이다리(新西海橋)를 건너와서 사아카아바시 공원을 바라본 모습.

다리 자체보다 다리를 양쪽에서 받혀주는 아취의 모습으로 인해 신사이카이다리가 더 돋보이는듯하다.



오늘 나가사키 성지순례 3일차 여정을 마치고 사세보시의 파라다이스 그랜드 호텔에서 세번째 저녁을 맞이한다. ^^**^^







Gregorian - Night in white satin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