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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순례

배티성지(한국의 카다콤브)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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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신부 기념관 (대성당)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

2011년 4월 15일 기공, 2012년 4월 15일 봉헌된 대성당.



한국의 카타콤브(Catacomb), 배티성지 안내판.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 663-13(양백리)에 있는 천주교 성지다.

 313번 도로를 따라오면 배티성지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을 만난다.


  카타콤브(Catacomb)는 초기 그리스도인의 은신처이자 활동무대였던 지하 공동묘지를 말합니다.

  로마의 카타콤브가 있다면 이 땅에는 배티 순교성지가 바로 카타콤브입니다.



     배티성지 :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노고산 아래 위치한 진천 배티 성지(聖地)는 많은 순교자의 정신을 기리고 기도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동네어귀에 배나무가 많아 배나무고개, 즉 이치(梨峙)라는 말이 생겨났고 이것이 순수한 우리말로 ‘배티’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배티는 신유박해[1801]로부터 병인박해[1866]까지 이어지는 천주교 박해시대 때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골짜기이다.

  1830년을 전후로 교우촌[비밀신앙공동체]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1866년 즈음에는 교우촌이 15곳에 이르렀다.

  이러한 천주교 역사를 배경으로 1976년 9월 성지로 개발되었다.

  2011년 3월 4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되었다.



최양업 신부 기념관 (대성당) 옆모습.

  1830년(순조 30)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충청도와 경기도가 나뉘는 배티 골짜기와 그 인근에 교우촌이 자리 잡기 시작하여

  1866년(고종 3) 무렵에는 15곳 이상으로 늘어났다.

  기록에 나타나는 교우촌만 해도 배티, 삼박골, 은골, 정삼이골, 절골, 용진골, 동골, 지구머리, 발래기, 퉁점, 지장골, 원동,

  굴티, 새울, 방축골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기념 대성당 우측에 자리하고 있는 매괴의 성모 마리아상.

성전 왼쪽 옆 7개의 총알이 자국이 선명한 매괴의 성모님(감곡 성당) 모습으로 제됐다.


  매괴의 성모 마리아상 :

  6·25전쟁 때 감곡성당이 인민군의 임시 요새로 사용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인민군은 성당 위에 모셔진 성모상을 총을 쏴서 깨어버리려

  하였으나 총알이 무려 7발이나 성모상을 관통하였는데도 성모상이 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망치로 성모상을 깨어 버리려 하자 성모상이 눈물을 흘려 그 인민군이 성모상을 훼손할 수 없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성당 전면 벽의 최양업 신부님 부제 시절 기도문.

1847년 홍콩에서 여든 두 분의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전 라틴어 번역을 끝마치면서 바친 기도문이다.



대성당에서 미사 준비를 하는 신자들.



최양업 신부 기념 대성당 제대.




대성당 내부 벽면의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

성당 내부 모든 스테인드 글라스가 최양업 신부의 사목 활동 모습으로 체워져있다.



성당 내부 한 켠의 특별한 스테인드 글라스.

왼쪽부터 최양업 토마스 신부, 이성례 마리아, 최경환 프란치스코, 베르뇌 시메온 주교의 모습이다.



순교현양비.

병인박해 때 체포된 신자들을 관아로 압송 도중 도망 못가게 묶어놓았던 돌기둥이다.




순교현양비 안내문.



십자가의길 로 오르는 길목의 소나무가 우거진 쉼터.



십자가의길 로 오르는 길목의 소나무가 우거진 쉼터.



신덕(信德), 망덕(望德), 애덕(愛德).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해 준 세 가지 은총인 믿음[信]·희망[望]·사랑 [愛]의 삼덕(三德)을 스스로 깨달아

  현세에서는 하느님의 믿음·희망·사랑의 증인이 되고,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공경하기 위해 바치는 기도이다.

  정확히는 신망애 삼덕송(信望愛 三德誦)이다.



최양업 신부 탄생 기념 성당.

1996년 3월 1일에 착공하여 이듬해 6월 15일에 완공된 최양업 신부 탄생 175주년 기념 성당이다.



최양업 신부 탄생 기념 성당 앞의 매괴의 성모님상.

성모님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은 성모님께 대한 직접적인 기도가 아니라 우리가 어머니를 통해서

아버지에게 말씀 드려 달라고 하듯 성모님을 통해서 하느님께 빌어달라고 전구(轉求) 하는 것이다.



최양업 신부 탄생 기념 성당 내부.



최양업 신부 탄생 기념 성당(윗성당) 내부 제대의 십자가상과 마리아상.





최양업 신부 탄생 기념 성당.



최양업 신부 탄생 기념 성당(지하) 제대.




최양업 신부 탄생 기념 성당 기도처.



최양업 신부 탄생 기념 성당을 옆에서 본 모습.

2층 구조로 지어졌으며 1층, 2층 모두 성당이다. 2층성당을 윗성당 이라고 부른다.



산상 제대 올라 가는 길목에 서 있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상.



양업 영성관 (피정의집).

이곳은 특별한 프로그램 없이 개인이 각자 하고 싶은 대로 기도와 묵상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십자가의 길.

연자매 위에 청동으로 조각된 십자가의 길로 성지 성당에서 야외 제대까지 이어져 있다.


  십자가의 은 1540년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에 의해서 오늘날의 「십자가의 길」이 확정된 것이고,

  순례자들이 예수님의 수난의 길을 소중히 여기고 기억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길이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가장 좋은 기도로, 특별히 사순절에 널리 행해지고 있다.



십자가의 길 제1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마태 27,50)



산상 제대 (야외성당).



산상 제대 위의 성모 마라아상.



산상 제대의 성모 마라아상.

이곳 성모상의 특징은 손이 유난히 큰게 특징이다.

이유는 우리에게 보다 많은 자비를 배풀어 주시기 위함이라한다 (성지 사목 신부님 말씀).



산상제대 오름길의 쉼터.



쉼터 근처의 성 알퐁소의 말씀을 적은 안내판.

온전한 마음으로 들어오라. 홀로 머물러라. 다른 사람이 되어 나가라.



쉼터에서 내려다 보이는 최양업 신부 박물관(순교.박해 박물관)



2007년에 성지 양업 전시관을 완공하였다.
배티성지 문화재 지정(2011념) 기념사업으로 2012년 기공, 2014년 4월 11일 개관했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양업교 앞에 전시된 형구돌.

형구돌은 잉명 순교돌 이라 부르며 신자들의 교수형구로 사용된 돌이다.



형구돌 설명판.



양업 박물관을 양업교와 형구돌과 함께 담아본 모습.



박물관에 들어서면 1층 전시실의 모습.



천주교 박해시설 관아에서 사용했던 형틀과 기구들과 배교를 강요하며 고문하는 모습의 벽화.



나무기둥에서 뻗어나가는 가지 모습으로 그린 교회 역사 내용의 벽화.



박물관 2층 전시실 모습.



2014념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님 청주교구 사목방문 기념 전시물.



2층 전시실의 성모 마리이상.



한국 천주교 교회의 최초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기념 전시물.



313번 국도변에서 바라본 최양업 신부 박물관 모습.

좌측은 최양업 신학생때 신학교및 기숙사였던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모습이고

우측은 최양업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은 안토니오 성당 모습으로 2층 구조의 건물이다.

겉에서는 두 건물로 보이지만 내부는 한 건물의 구조로 되어있는것 이 특징이다.



최초의 신학교 건물 초입 103위 성인 계단.



최초의 조선교구 신학교와 최양업 신부의 성당사제관으로 사용되던 초가집을 재현한 건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이자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는 선교지 사제 양성을 위해 1850년(철종 1) 조선교구

  신학교를 세웠고, 그해 9월 신학교 교장인 다블뤼 신부[후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는 배티 교우촌에 신학교를 정착시켰다.



 병인박해 순교자 유(劉)데레사 묘.



최경환 프란치스코,  최양업 토마스 신부,  이성례 마리아.


  최양업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으로 발탁되었으나 1849년(헌종 19) 상하이에서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는 박해 시대의 상황으로 김대건 신부가 프랑스 선교사들의 안내자 역할을 맡게 되면서 1845년(헌종 15)에 먼저 서품을 받고

  서해안을 통해 몰래 입국하였기 때문이다.

  양업 신부의 아버지는 103위 순교 성인 중 한 사람인 최경환 프란치스코이며,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도 순교하여 현재 시복시성이 추진 중이다.



  다블뤼 신부는 배티마을에 성당과 사제관을 겸한 초가집을 마련하고 1853년 여름까지 기거하면서 신학생들이게 소신학교 과정을 가르쳤다.

  다블뤼 신부의 뒤를 이어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1821~1861] 신부가 신학교를 맡았다.

  최양업 신부는 1854년 3월까지 세 명의 신학생[임 빈첸시오, 김 사도요한, 이 바울리노]을 양성하여 페낭으로 유학을 보냈다.



최양업 신부와 최초의 신학교.


  최양업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사제 서품을 받은 뒤 7개월 동안 한국 사제로는 최초로 요동 지역에 있는 차구성당에서  중국인의

  사목을 담당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입국한 최양업 신부는 선종하는 순간까지 12년 동안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황해도 등의 교우촌을

  방문하여 사목 활동을 하여 ‘한국의 바오로 사도’로 불리며,

  순교의 피를 흘리진 않았지만 순교자와 똑같은 삶을 살았다고 하여 ‘땀의 순교자’로도 불린다.



복자 오반지 바오로 묘와 무명 순교자의 묘 안내판.



복자 오반지 바오로 묘.



무명 순교자 14인의 묘 입구.



14인 무명 순교자 묘역.

  1866년 대원군이 일으킨 병인박해로 약 8,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문헌에 나타난 진천 출신의 순교자들은 백곡 발래기의 김원중 스테파노·김선화 베드로·신성순·신성수·이성유, 진천 지장골의 오반지

  바오로·이영준 아우구스티노, 이월 새울의 조대여 판크라시오·김준기 안드레아·신 서방·허 서방, 진천 배티의 장 토마스·송 베네딕토·

  송 베드로와 그 딸·이 안나와 그녀의 아이·송 바르나바·장 서방·이 서방, 백곡 절골의 박 프란치스코·오 마르가리타, 덕산 방축골의

  김성서 파비아노·민윤명 프란치스코·김백심 암브로시오·이 베드로, 백곡 용진골의 손관보 베드로·여 요셉, 진천 동골의 오사룡,

  백곡 퉁점의 윤 바오로, 진천 굴티의 김성회 바오로·김 사도요한, 진천의 김조이 막달레나 등이다.

  ‘선참후계(先斬後啓)’의 지침에 따라 순교한 순교자들은 구전과 집안 족보 등에 의해 전해진 무명 순교자의 무덤은 27기에 이른다.




배티성지는 순교자들이 박해를 피해 천주교 신앙의 꽃을 피우다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린 고귀한 땅 배티와

그 인근의 교우촌은 신앙의 증거자들과 순교자들의 고향이며 그들이 살아 숨 쉬는 고귀한 안식처가 되고 있다.

화창한 오월 중순이 시작되는날 찾아본 순교자들의 숨결이 살아숨쉬는 배티성지에서

몸과 마음과 정신을 힐링하며 뜻깊은 하루를 보낸 기분 좋은 성지순례였다. 

^^**^^



First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