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봉산(506.1m)과 천보산(423m)은 수도권에서 가까운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북동쪽을 에워싸고 있는 산입니다.
칠봉산 북으로는 동두천시 탑동, 천보산 동으로는 포천시 동교동과 경계를 이룹니다.
칠봉산 (七峰山, 506.1m) : 옛날 단풍으로 물든 풍광이 비단병풍과 같다 해서 일명 금병산으로도 불렸습니다.
또 조선도 때 세조가 말년에 이 산에 올라 수렵했다는 기록도 있어 어등산이라는 이름도 얻었습니다.
세조 후 약 400년이 지나 나온 대동여지도에는 어등산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칠봉산을 두고 양주군지에는 1 임금이 처음 등산을 하기 위해 떠난 곳이라는 뜻인 발리봉發離峰, 2 임금이 수렵에 필요한 매를 날렸던 곳이라는 매봉鷹峰, 3 임금이 수렵 표시 깃발을 꽂았다는 깃대봉旗臺峰, 4 임금이 돌이 많다고 말한 곳이라는 석봉石峰, 5 사냥 중 임금이 쉴 때 호위하는 군사들이 갑옷과 투구를 잠시 벗어 놓았다는 투구봉鬪具峰, 6 임금이 사냥터를 떠나며 돌이 많으니 뜻하지 않은 일에 조심하라고 당부했다는 곳인 돌봉突峰, 7 임금이 군사를 거느리고 떠날 채비를 하던 곳이라는 솔리봉率離峰으로 이뤄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산마루에 7개의 봉우리가 연이어지기 때문에 산 이름이 칠봉산으로 지어졌다고 전해집니다.
산세는 북쪽은 완만한 육산이고, 남쪽은 급경사 바위절벽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호젓하고 완만한 능선길로 이루어져, 곳곳의 전망대에서 조망을 즐길 수 있는 걷기 편안한 육산 입니다.
천보산(天寶山, 423m) : 하늘 밑 보배로운 산이라는 뜻인 천보산은 포천시와 양주시의 경계 중앙에 솟아 있습니다.
천보산은 길게 걸쳐있어서 마을과 마을을 넘어 다니던 고개가 많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조선 초기에 태조가 무악대사와 함께 회암사를 찾을 때 넘었다고 하여 붙여진 어하고개, 차돌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거나 혹은 호랑이 때문에 백 명씩 모여 다녀야 하는 고개라 하여 붙여진 백석이 고개, 회암동에서 포천으로 넘어가는 회암고개, 율정동에서 포천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돌문이 있던 고개라 하여 석문령이라는 고개가 있습니다.
천보산이라는 이름은 15세기 전반의 사실을 반영하여 태종실록에 처음 확인되며, 각종 옛 지도에서 이름이 확인됩니다.
회암사 (檜巖寺) :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입니다.
1328년(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指空)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였으며, 1378년(우왕 4) 나옹(懶翁)이 중건하였습니다.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이 절의 승려 수는 3,000명에 이르렀으며,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절로, 조선의 태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수도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효령대군(孝寧大君)도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1424년(세종 6)의 기록을 보면 이 절에는 250명의 승려가 있었고, 경내가 1만여 평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1472년(성종 3)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정현조(鄭顯祖)에게 명하여 중창하였으며, 명종 때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 재흥정책을 펼 때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으나, 왕후가 죽고 유신(儒臣)들에 의해 나라의 정책이 다시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1565년(명종 20) 사월 초파일에 보우(普雨)가 잡혀 가고 절은 불태워짐으로써 폐허화되었습니다.
칠봉산, 천보산 등산 개념도.
칠봉산, 천보산 등산지도.
산행일 : 2024년 01월 27일 (토). 날씨 - 맑음, 바람 ( -3℃ ~ 5℃ )
산행길 : 들머리 - 봉양사거리 날머리 - 회암사지
* 봉양사거리 - 말리봉 -독수리봉- 석봉 - 투구봉 -칠봉산 - 장림고개 - 솔리봉 - 천보산 - 회암사지
산행거리 : 약 8.5km. 4시간 30분 (점심, 휴식포함)
동두천행 1호선 전철을 이용하여 덕정역에서 하차, 역 건너편에서 지역 버스 53번 버스를 이용하여 약 10분 미만의 거리에 있는 봉양 사거리로 향합니다.
덕정역 건너편에서 지역 버스 53번 버스를 이용하여 약 10분 미만의 거리에 있는 봉양 사거리에서 하차. 거기서부터 바로 산 능선을 들머리로 하여 칠봉산 ~ 천보산 산행을 시작합니다.
한 겨울 가장 추운 때이지만 이번 겨울은 눈 구경하기가 참 힘듭니다.
이곳이 경기 북부지역이지만 이곳 역시 산길인데도 눈이 없어 가뜩이나 썰렁한 겨울산이 더 추워 보입니다.
이곳 칠봉산은 6.25 전쟁 당시 한국군 1개 연대와 북한군 4사단이 치열한 전투를 했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2009년 이곳에서 국군 전사자 유해 8위, 탄피, 전투화등 유품 30점을 발굴하여 국립 현충원에 모실 수 있었습니다.
칠봉산 일부 등산로는 산악자전거를 즐길 수 있는 MTB코스가 일반 등산로와 일부 겹치기도 하는 등반로입니다.
여기는 지도상의 칠봉산 정상이고, 실질적인 칠봉산 정상은 여기서 한참 더 진행하면 고도 526m의 바위 군락을 만납니다.
이곳은 고도계가 칠봉산 정상석이 세워진 곳(506m) 보다 20m가 더 높은 526m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 고려말의 승려 선각왕사 나옹(1320~1376)을 추모하기 위해 1377년 (우왕 3년) 건립된 비입니다.
회암사 (檜巖寺) :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입니다.
1328년(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指空)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였으며, 1378년(우왕 4) 나옹(懶翁)이 중건하였습니다.
회암사지(檜巖寺址) : 사적 제128호.
1313년 이전에 이미 절이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326년 고려에 온 인도 승려 지공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이 절의 승려 수는 3,000명에 이르렀으며,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절로, 조선의 태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수도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효령대군(孝寧大君)도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1424년(세종 6)의 기록을 보면 이 절에는 250명의 승려가 있었고, 경내가 1만여 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1472년(성종 3)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정현조(鄭顯祖)에게 명하여 중창하였으며, 명종 때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 재흥정책을 펼 때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으나, 왕후가 죽고 유신(儒臣)들에 의해 나라의 정책이 다시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1565년(명종 20) 사월 초파일에 보우(普雨)가 잡혀 가고 절은 불태워짐으로써 폐허화되었다.
이 사지는 현재 서울의 중앙여자고등학교 소유로서 안내판만 있을 뿐이고, 여기서 500m쯤 올라가서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 현재의 회암사가 있다.
당간지주 (幢竿支柱) : 양주시 향토유적 제13호.
회암사지 당간지주는 현 위치에서 좌측으로 15m 거리에 있는 담장 지대석(址臺石) 밑에 쓰러져 매몰되어 있던 것을 1981년 발굴하여 복원한 것이다.
원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 아마도 회암사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하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당간 지주는 2주가 세트를 이루어 하나로 구성되기 때문에 본래 2쌍으로 모두 4주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1주는 전하지 않는다.
태조 이성계 치유의 궁궐 안내판이 있는 화엄사지 공원 입구에서 멀리 천보산 산자락을 바라보며 오늘 산행을 마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