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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북도

해미읍성과 문수사의 왕겹벚꽃과 매발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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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사 (文殊寺)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운산읍 태봉리 상왕산(象王山)에 있는 절이다.


해미읍성 (海美邑城)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소재한 조선시대의 읍성으로 사적 제116호다.



간월암에서 개심사를 가기위해 T-map을 켜니 고속도로가 밀리는지 국도로 길을 안내 해준다.

단조로운 고속도로 보다는 나름대로 운치있는 지방길을 달리니

볼거리도 풍성하고 창문 넘어 불어오는 바람도 상큼하다.


그렇게 맑은 공기를 마셔가며 국도를 달리다보니 언듯 낮 익은 장소가 눈에 띈다.

간월암에서 개심사로 가다보면 중간에 만날 수 있는 '해미읍성'이다.

참새가 방아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해미읍성'으로 향한다.



해미는 1414년(태종 14)에 충청도 덕산으로부터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옮겨온 곳으로,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전한 1651년(효종 2)까지 군사적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해미읍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조되어 서해안 방어를 맡았던 곳 이기도 하다.


해미읍성 중심에 자리한 '호서좌영'(湖西左營)

해미읍성은 1418년(태종 18) 충청도에 설치된 두개의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 중 하나로 1491년(성종 22)에 완성되었으며,

1651년(효종 2)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졌고 해미영(海美營)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충청도의 5개영 중 하나로 호서좌영(湖西左營)이라 칭하였다.


호서좌영의 '동헌'.

동헌은 조선시대 지방 관아에서 고을의 원(員)이나 현감(縣監), 병사(兵使), 수사(水使), 감사(監司) 및

그 밖의 수령(守令)들이 주재하는 건물로 정무(政務)를 집행하고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이다.


1866년(조선 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 이후 1882년(고종 19) 사이에 진행된 천주교 박해 때

충청도 각 고을에서 붙잡혀온 수많은 천주교인을 국사범으로 처형한 해미 진영이다.


동헌에서 정무회의를 하고 있는 관리들의 모습.


죄인들을 단죄하던 형틀과 죄인들을 가두어 두던 '옥사'.


운제 (雲梯)

전쟁시 사용했던 무기들로서 성을 공격할때 사용했던 공성무기로

높은 사다리가 구름에 닿을만큼 높다고 하여 붙혀진 이름이다.


검차 (劍車)

수레의 전면에 설치된 방패에 칼을 꽃아 만든 무기로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다.

이 외에도 투석기, 신기전기화차, 천자총통, 대장군포, 그리고 별대완구라는 화포도 전시되어있다.


우물

해미읍선의 중심부에 설치된 우물.

지금은 말라 있지만 아마도 예전에는 물이 풍부 했었단다.


잘 보존 되어있는 민초들의 초가집 군락.


돌담과 초가집.

내부에 그시절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여 놓았다.


읍성안의 이곳 저곳을 누비며 안내 해주는 관광마차의 모습이 여유롭다.


1960년에 이 성을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읍성의 표본으로 삼아 사적으로 지정하고 보수공사를 하는 한편,

성 안팎에 무질서하게 자리잡은 민가를 철거·이전시키고 종합적인 보존계획을 세웠다.


해미읍성 안의 넓게 자리한 잔디마당.

이곳의 각종행사와 주민들의 쉼터 공간으로 활용된다.


해미 (海美) 라는 이름은 충청남도 서산지역의 옛 지명이다.

이곳은 정해(貞海). 여미(餘美) 두 현을 합한 지명이다.


1407년(태종 7) 정해·여미 두 현을 합하여 해미로 고치고 정해를 그 치소로 삼았고, 1413년 현감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 군(郡)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서산군에 병합, 1917년 해미면이 되었다.

1995년에는 서산군과 서산시가 통합되어 서산시가 되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으며

1981년에는 성 안의 일부를 발굴한 결과 관아 터가 확인되었다.


이 건축물은 이름은 알 수 없었으나 앞마당에서는 국악인들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옛 역사의 영화와 아품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해미읍성을 나서며 개심사로 향한다.



해미읍성을 출발하여 개심사로 향하여 가는데 개심사 입구 신창저수지길을 지나며

거북이 걸음을 하던 차량들이 요지부동, 전혀 움직일 생각을 안한다.

저수지 주변 2차선 도로에 한쪽 차선을 아마도 개심사에 온듯한 차량이

빼곡히 정차하고 있어서 극심한 정채 현상을 빗고 있는듯 햇다.

한참을 기다려도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어렵게 차를 돌려 문수사로 향한다.


 

문수사 입구에 도착하니 여기도 나들이 차량이 많아 길이 여유롭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입구와 출구가 따로 있어서 극심한 혼잡은 없었다.


문수사 입구에서 부터 만나는 만개한 왕겹벚꽃이 보는이를 황홀경에 빠뜨린다.


길 양편으로 들어선 왕겹벚꽃은 한창 만개한 상태여서 그 모습은 더할 나위없이 화려하고 예뻤다.


왕겹벚꽃에 취해 10여분을 오르면 만나는 '상왕산문수사' 일주문.


문수사 일주문을 지나 만나는 길도 왕겹벚꽃길의 연속이다.


개심사의 왕겹벚꽃이 이름나 아름답다고 하지만 이곳

문수사 왕겹벚꽃도 절대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었다.


탐스럽게 핀 꽃들이 마치 주렁 주렁 열린 포도송이처럼 예쁜 모습을 보여준다.


은은한 연분홍빛 색상이 어찌 저리도 고우며 꽃 모양은 어찌도 저리 예쁜지.


왕겹벚꽃은 자체로도 예쁘지만 주위와 어우러져 피어 있는 모습도 아름답다.

왕겹벚꽃에 홀려 꽃길을 걷다보니 문수사 경내로 들어선다.


문수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의 말사이다.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가람의 배치 등으로 미루어보아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내에 들어서면 만나는 '극락보전'(極樂寶殿).

고려 말에 창건된 문수사극락보전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보전 안에 봉안되어있는 주불인 여래상을 비롯, 아미타불, 미륵불, 나한상, 보살상과 각종의 탱화.


1973년문화재관리국에서도 극락보전에 안치된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34호인 문수사금동여래좌상을 조사하였고,

불상의 복장(腹藏)에서 발원문을 비롯하여 모시로 된 단수의(短袖衣)와 쌀·보리 등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는데,

이 발원문은 1346년(충목왕 2)에 쓴 것이다.



조선시대에 도둑의 무리들에 의하여 극락보전만을 남긴 모든 당우들은 불타버렸단다.

극락보전은 조각수법이 수려하고 웅장할 뿐 아니라 많은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1994년 무렵 지어진 '산신각'과 '나한전'(우측끝부분).


'나한전'(羅漢殿)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산신각과 나한전, 요사인 무량수각 등이 있다.



사찰 주변에서 소담스러운 꽃밭을 만난다.

거기에는 하늘매발톱이 보라색 자태를 자랑하며 무리지어 피어있다.


하늘 매발톱.


하늘 매발톱과 어우러져 피어 있는 카라메로 매발톱.


카라메로 매발톱.


매발톱꽃은 붉은매발톱, 하늘매발톱, 카리메로매발톱, 캐나다매발톱이 있다는데

본인은 그저 매발톱으로 아는것 만으로 만족한다.

  

문수사 옆의 작은 연못 주변에도 왕겹벚꽃과 새 잎을 돋우는 나무들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있다.


문수사의 아름다운 모습을 뒤로하고 왔던길을 되짚어 간다.


붉은 연산홍과 어우러진 왕겹벚꽃.


왕겹벚꽃 주변에는 아름다운 모습을 담으려는 많은 상춘객들이 사진찍기에 여념이없다.


이 봄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보는 산사의 꽃길이다.


맑은 하늘과 어우러져 한껏 매력을 발산하는 왕겹벚꽃.


문수사 일주문을 벗어나며 일주문 옆모습을 왕겹벚꽃과 함께 담아본다.


야산의 목초지와 왕겹벚꽃의 조화.

이 지역은 소를 많이 사육하는 관계로 야산을 목초지로 가꾼곳이 많다.


집으로 돌아가는길의 애벌갈이 논과 밭 그리고 드넓게 가꾸어진 목초지의 푸루름이

오늘 본 유채꽃, 간월암, 해미읍성 그리고 왕겹벚꽃이 마음의 평온함과 넉넉함을 선사한다.  ^^**^^